날기새 김동호 #2311 — 회개 없이 죄사함 없다

김동호 목사님의 새벽 QT 「날마다 기막힌 새벽」(날기새)을 듣고 남기는 묵상 노트입니다.
원 설교: 날기새 #2311 (김동호 목사 아카이브)

오늘 본문: 마가복음 1장 1~6절 — 요즘 계속 같은 본문을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그 복음의 첫 장면에 세례 요한이 광야에 서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합니다. 오늘 설교는 그 한 구절, ‘회개’에 걸려 멈춰 섭니다.

말씀의 흐름

목사님은 먼저 왜 예수님이 복음이신가를 묻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구원이고, 그래서 복음입니다. 세상에 사람이 되려는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사람이 되려 하셨고 실제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목사님은 ‘구원’이라는 말의 전제를 짚습니다. 구원이라는 단어가 성립하려면 우리가 물에 빠져 죽게 된 상태여야 합니다. 물이 아니라 죄에 빠져 죽게 되었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말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죄는 어떻게 해결되는가. 오직 용서를 통해서만 해결됩니다. 상대방이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죄를 스스로 어쩌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일곱 번까지 용서하리이까”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묻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죄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는 일이 가능합니까.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친구가 친구를 —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그런데 부모는 자식의 죄를 그만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결론이 나옵니다. 얼마큼 사랑하는가가 어디까지 용서하는가를 결정합니다. 사랑의 크기가 용서의 크기를 결정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해 택하신 방법은 십자가였고, 십자가는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는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못 박으리만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는 이제 용서해 줄 수 없는 죄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모두 구원을 얻었습니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제법 많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지 않으셔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셔서가 아닙니다. 그가 용서받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용서에는 반드시 전제가 있는데 그것이 회개입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빌 때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회개 없이 용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 —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십니다. 자백하면, 입니다. 자백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십자가의 보혈로도 깨끗함을 입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백하지 않는 사람, 자기가 죄인인 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회개가 참 어렵습니다. 왜 어려운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잘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잊어버리고 살고,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죄를 감추고 비밀로 하다가 남을 속이고 나중엔 자기도 속습니다.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었어? 내가 무슨 회개를 해?” 거기다 돈을 좀 벌고, 성공하고 출세하고, 조금 유명해지고 높아지고 힘이 생기면 자아도취가 되어 회개는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목사님은 구두방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신발이 떨어져서 수선을 맡기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접착제를 바르는 게 아니라 샌드페이퍼로 불순물을 갈아내는 일입니다. 불순물이 끼어 있으면 붙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붙음’인데,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갈라놓는 죄를 깨끗이 닦아내야 붙습니다. 그게 회개입니다.

마지막은 세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시 「큰소리로 말씀치 않으셔도」 — “죄는 많으면서도 뉘우침조차 사무쳐 오지 않는 불모의 사막.” 20대에 읽고 평생 잊을 수 없었다고 하십니다. 윤동주의 서시 — 잎새에 ‘부는’ 바람도 ‘떠는’ 바람도 아니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그 마음. 그리고 동굴에서 하루 종일 기도하던 성 프랜시스, 그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제발 좀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였습니다. 그래서 산상보훈의 팔복 가운데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이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하십니다. 자기 죄를 아파할 줄 아는 것, 그것이 복입니다.

내게 남은 것

오늘 말씀에서 제일 무서운 문장은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그가 용서받기를 거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용서는 이미 십자가에서 다 끝났는데, 내가 받지 않아서 무관해지는 것. 일터에서도 똑같은 구조를 봅니다.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그 정도는 다들 하는데”, “나만 하면 괜찮은데”로 넘어가는 순간, 고칠 기회도 같이 사라집니다. 문제는 지적이 아니라 인정하지 않는 나였습니다.

더 뜨끔한 건 회개가 어려워지는 조건이었습니다. 돈을 좀 벌고, 성과가 나고, 직함이 올라가고, 사람들이 알아주기 시작하면 회개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말. 커리어가 올라갈수록 내 말이 맞다는 확신만 두꺼워지고, 사과하는 능력은 반비례로 줄어드는 걸 실제로 봅니다. 성공은 실력을 키우지만 동시에 자백하는 근육을 약하게 만듭니다.

샌드페이퍼 비유를 오늘 하루 붙잡고 싶습니다. 붙이려면 먼저 갈아내야 한다는 것. 하나님과 붙어 있고 싶다면 사이에 낀 불순물부터 인정해야 한다는 것.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줄 아는 예민함을 무뎌진 양심에 달라고 구하는 것 — 성 프랜시스가 하루 종일 구한 것도 결국 그것이었습니다.

오늘의 기도: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시고, 그것을 아파할 줄 아는 마음을 주소서.


함께 들은 음악 🎹

새벽 묵상 시간에 가사 없는 피아노를 낮게 틀어두면 말씀에 집중하기 좋습니다.


이 글은 김동호 목사 아카이브 채널의 설교를 듣고 쓴 개인 묵상입니다. 전체 말씀은 꼭 원 영상으로 들으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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