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기새 김동호 #2279 — 나는 되고 남은 안 되고

김동호 목사님의 새벽 QT 「날마다 기막힌 새벽」(날기새)을 듣고 남기는 묵상 노트입니다.
원 설교: 날마다 기막힌 새벽 #2279 (김동호 목사 아카이브)

오늘 본문: 창세기 38장 24~26절 —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여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합니다.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그런데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받아 든 순간, 그 입에서 전혀 다른 말이 나옵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말씀의 흐름

목사님은 먼저 계대결혼 제도를 설명하며 이야기의 배경을 깔아주십니다. 형이 자식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에게 들어가 아이를 낳아 형의 대를 잇게 하는 제도입니다. 유다의 장남 엘이 하나님 앞에 악하여 자식 없이 죽고, 동생 오난은 낳아도 자기 아들이 되지 않는 것을 알고 땅에 설정하다가 역시 하나님께서 데려가십니다. 남은 것은 막내 셀라뿐인데, 유다는 셀라마저 죽을까 두려워 “장성한 후에 너에게 들여보내마” 약속해 놓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창녀로 가장하고 시아버지를 속여 베레스와 세라를 낳습니다. 여기서 목사님은 단단히 못을 박으십니다. 다말은 음란한 여인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 그것은 문화였고, 다말은 자식 없이 죽은 남편의 대를 잇는 것을 자기의 본분으로 믿었던 사람입니다. 과부가 임신하면 정말로 불살라 죽이던 때였습니다. 그 죽음을 무릅쓰고 본분을 다하려 한 것이니, 목사님은 오히려 “굉장히 위험을 무릅쓴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고 보십니다. 하나님도 그 행위를 음란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베레스가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고, 유다 자신의 고백 “그는 나보다 옳도다”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다말을 음란한 여인으로 읽는 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설교의 칼끝이 유다를 향합니다.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다는 당연히 행음했다고 단정합니다. 셀라를 주지 않았으니 다른 설명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목사님은 여기서 충격을 받으셨다고 하십니다. 자기도 행음한 것 아닙니까? 며느리인 줄 몰랐을 뿐, 창녀인 줄 알고 관계한 것은 분명히 유다 자신입니다. 그런데 그 유다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끌어내어 불사르라” 합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 내로남불의 전형을 유다가 그대로 보여줍니다.

목사님이 짚으시는 대목이 날카롭습니다. 유다에게는 부끄러움조차 없었습니다. 스스럼없이 창녀에게 가서 제안하고, 나중에는 친구를 보내 담보물을 찾아오게 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몰래 가서 찾아올 텐데, 대놓고 심부름을 시킬 정도로 그 일이 부끄러움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죄의식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똑같은 일을 여자가 하면 “여자는 그러면 안 돼” 하고 불사르라 합니다.

문제는 이 편견이 유다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목사님은 “우리에게는 거의 모두에게 이 유다의 편견이 있다”고 하십니다. 남자는 이래도 되고 여자는 안 된다는 생각이 역사 속에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습니까. 목사님은 당신이 속한 교단 이야기까지 꺼내십니다. 남자는 목사 안수를 받고 여자는 안 된다는 것 —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예수 안에서 다 하나라고 가르치는 성경 앞에서, 그것도 편견이라고 보신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은 들보와 티 이야기로 맺습니다. 보통 사람은 자기 죄에는 관대하고 무감각하며, 남의 죄에는 민감합니다. 남이 잘못하면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 펄펄 뛰고, 목사가 잘못하면 “목사가 그럴 수 있느냐” 하면서, 정작 자기가 같은 잘못을 하면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은 정반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부르짖고, 끝내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까지 고백했습니다. 자기에게는 철저한 잣대를, 남에게는 너그러운 잣대를 댔다는 것입니다.

내게 남은 것

일터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저 사람은 왜 저래?”입니다. 그런데 그 문장을 나에게 똑같이 적용해 본 적이 있는가 물으면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마감을 놓치면 사정이 있는 것이고, 동료가 놓치면 태도의 문제입니다. 내가 자료를 늦게 보내면 바빠서고, 남이 늦게 보내면 무책임입니다. 잣대가 두 개인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이유는, 유다가 그랬듯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담보물 찾아오라고 친구를 보내던 그 태연함이 내 안에도 있습니다.

오늘 목사님이 제시하신 기준은 단순합니다. 편견을 아예 없애기 어렵다면 방향을 바꾸라는 것 — 내 죄에는 민감하고 남의 죄에는 너그럽게. 더 정확히는, 나와 남에게 같은 잣대를 댈 줄 아는 공정함입니다. 팀을 평가할 때, 사람을 판단할 때, 내 기준이 지금 두 개로 갈라져 있지 않은지 먼저 확인하는 일. 그게 오늘 하루의 숙제입니다.

또 하나 남는 것은 다말을 다시 읽는 눈입니다. 소식을 전한 사람도 “네 며느리가 행음하였다”고 했고, 유다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말할 때 그 사람은 사실 자기 본분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남에 대한 평가가 여러 입을 거쳐 내게 도착할 때, 그 평가를 그대로 받아 “불사르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도장과 끈과 지팡이가 나올 때까지는, 판결을 유보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남을 재던 그 잣대를 먼저 제게 대게 하시고, 남에게는 한 뼘 더 너그럽게 하소서.


함께 들은 음악 🎹

새벽 묵상 시간에 가사 없는 피아노를 낮게 틀어두면 말씀에 집중하기 좋습니다.


이 글은 김동호 목사 아카이브 채널의 설교를 듣고 쓴 개인 묵상입니다. 전체 말씀은 꼭 원 영상으로 들으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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