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기새 김동호 #2252 — 사람을 사람으로 보라

김동호 목사님의 새벽 QT 「날마다 기막힌 새벽」(날기새)을 듣고 남기는 묵상 노트입니다.
원 설교: 날마다 기막힌 새벽 #2252 (김동호 목사 아카이브)

오늘 본문: 창세기 24장 1~4절 — 어제와 같은 본문입니다. 어제는 늙은 종 엘리에셀을 중심으로 읽었다면, 오늘은 그 엘리에셀을 대하고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관점으로 같은 장면을 다시 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손을 환도뼈 밑에 넣게 하고,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해 오라는 맹세를 시킵니다.

말씀의 흐름

목사님은 평소 가장 귀히 여기신다는 말씀 하나를 먼저 꺼내십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여기서 아주 중요한 구분이 나옵니다. 구별은 있을 수 있지만 차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은사가 다르고 능력이 다르니 구별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늘 반대로 합니다 — 차별은 없다면서 구별조차 하지 않고, 구별한다면서 실은 차별을 합니다. 목사님은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가장 비기독교적인 생각이고 삶의 자세라고 못 박으십니다.

이어서 오래된 질문 하나를 꺼내십니다. 미국 신학교에서 연수받던 시절, 목사님이 그곳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제기했던 물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기독교 국가가 어떻게 흑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삼을 수 있었느냐?” 사람을 사냥하고 사고팔았던 그 일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상 16장 7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우리는 늘 중심 대신 외모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 어느 지방 사람이냐, 남자냐 여자냐. 목사님은 우리나라의 강한 지방색과 편견을 특히 아프게 지적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러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지방색을 갖는 건 참 어리석은 일이라고요. 사람 나름이지, 어떻게 그 지역 사람을 다 매도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차별의 목록은 계속됩니다. 여성의 참정권이 주어진 게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는 것, 남존여비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사제·왕족·무사·서민·불가촉천민으로 사람을 계급화한 것,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사농공상이 있어서 직업이 곧 계급을 결정했다는 것. 그리고 오늘날 가장 노골적인 차별인 빈부 — 돈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을 얼마나 깔보고 업신여기고 은근히 무시하며 사는지 우리가 다 알지 않느냐고 물으십니다. 신분으로, 남녀로, 지역으로, 돈으로 차별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절대로 범해서는 안 될 오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날기새에서 수도 없이 반복하셨다는 한국 초기 기독교 이야기가 나옵니다. 초기 기독교의 위대함은 양반과 상놈, 천민에 대한 차별을 말이 아니라 삶으로 철폐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왕손 이재용 목사님이 예수 믿고 자기 마부를 “형님”이라 불렀다는 이야기 — 마부가 놀라 “나으리,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자, 예수 안에서 다 한 형제요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형님이라고 답했다는 것입니다. 머슴이 예수 믿고 목사가 되고 주인은 장로가 되었는데, 그 장로가 머슴 출신 목사님을 얼마나 잘 섬겼는지 모른다고, 그 머슴 출신 목사님은 교단에서 두 번이나 총회장을 지내셨다고 하십니다. 목사님이 처음 담임하셨던 승동교회는 백정이 처음 장로가 된 교회였고, 왕을 치료하던 의사 선교사가 콜레라 걸린 백정 마을로 찾아갔던 그 사건 — 왕의 생명과 백정의 생명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그때까지 듣도 보도 못하던 사상. 그것이 한국에 기독교 신앙을 뿌리내리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짚으십니다.

이제 본문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차별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종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 같고 집안의 물건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기 종을 신분으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엘리에셀이 정직하고 성실하고 충성된 것을 보고, 종에게는 맡기지 않는 일을 맡겼습니다. 집안 모든 소유를 맡겼고, 나아가 양자로 삼으려고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평범히 넘길 수 있는 대목이지만 그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백 살에 낳은 아들 이삭의 배필을 구하는 일 — 부모의 가장 중요한 일 — 을 엘리에셀에게 맡깁니다. 그것은 종에게 아들의 부모 역할을 하게 한 것입니다. “넌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야, 너는 단순한 종이 아니야.”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일,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은 오늘 우리를 보십니다. 보수냐 진보냐로 편을 가르고, 잘못된 것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진영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하는 일. 직업으로, 연봉으로, 소득으로, 강남에 사느냐 강북에 사느냐로 사람을 깔보고 업신여기고 정죄하는 일. 경제는 선진국 수준에 이르렀는데 “사람은 평등하다”는 이 기본적인 사상에 있어서는 얼마나 후진적이고 저급한지 모른다고 하십니다. 강한 자라고 굽신거리지 말고 약한 자라고 깔보지 말 것. 아브라함처럼 엘리에셀을 대할 수 있는 신앙의 실력을 갖추자는 권면으로 맺으십니다.

설교 끝에는 개인적인 부탁도 있었습니다. 갑상선암 수술 때 성대를 건드려 목소리가 좋지 않은데, 다른 건 걱정되지 않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설교를 못 하게 될까 그것이 제일 걱정이라며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내게 남은 것

“구별은 있되 차별은 안 된다”는 문장이 오늘 가장 오래 남습니다. 일터에서 역할과 책임과 능력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건 구별입니다. 그런데 그 구별이 어느 순간 사람의 등급으로 슬쩍 넘어가는 지점이 있습니다. 직급이 낮은 사람의 말은 덜 듣고, 협력업체 담당자에게는 조금 다른 말투를 쓰고, 결정권 있는 사람 앞에서는 목소리가 부드러워지는 것. 목사님 표현대로 “강한 자라고 굽신거리고 약한 자라고 깔보는” 그 본능이 제 안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단한 건 엘리에셀에게 잘해줬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일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배필을 구하는 일, 곧 부모의 자리를 종에게 내준 것입니다. 사람을 존중한다는 건 결국 말이 아니라 무엇을 맡기느냐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나는 누군가를 “신뢰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중요한 일은 늘 다른 사람에게 주고 있지 않은지. 존중은 태도가 아니라 위임의 문제였습니다.

한국 초기 기독교가 차별을 “말로가 아니라 삶으로 철폐해 버렸다”는 대목도 마음에 걸립니다. 마부를 형님이라 부른 왕손, 머슴 출신 목사를 섬긴 주인 장로, 백정 장로. 그들은 캠페인을 한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살아버렸습니다. 오늘 제가 할 수 있는 삶으로의 철폐는 아주 작을 것입니다.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것, 회의에서 가장 말수 적은 사람에게 먼저 묻는 것, 뒤에서 사람을 평가하는 자리에 끼지 않는 것.

오늘의 기도: 사람을 신분과 조건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게 하시고, 강한 자 앞에 굽신거리지 않고 약한 자를 깔보지 않게 하소서.


함께 들은 음악 🎹

새벽 묵상 시간에 가사 없는 피아노를 낮게 틀어두면 말씀에 집중하기 좋습니다.


이 글은 김동호 목사 아카이브 채널의 설교를 듣고 쓴 개인 묵상입니다. 전체 말씀은 꼭 원 영상으로 들으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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